잘 들어봐요, 스놉 여러분: 아담 펜틀턴은 여러분의 안심시키는 범주들에 결코 길들여지지 않는 예술 형식을 실천합니다. 1984년 미국에서 태어난 이 개념미술가는 20년 넘게 추상, 역사, 정체성에 대한 우리의 전통적 개념을 흔드는 시각적·이론적 어휘를 개발해왔습니다. 그의 다학제적 작업은 회화, 실크스크린, 비디오, 퍼포먼스, 출판으로 구성되며, 그가 창조한 ‘블랙 다다’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이루어집니다. 이 수수께끼 같은 표현은 선언문보다는 개념적 바이러스처럼 작용하여 접촉하는 모든 것을 감염시키고 재구성합니다.
펜틀턴의 예술 프로젝트는 예술이 모순된 이상을 동시에 소유하고 소유될 수 있는 방식에 대한 근본적 질문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이 변증법은 그의 추상 회화에서 특히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여기서 언어의 단편들, 단독 문자, 생략된 단어, 의미가 다할 때까지 반복된 구절들이 표현주의적 추상과 도시 시각 신호를 연상시키는 구성 속에 배회합니다. 스프레이 페인팅, 실크스크린, 사진을 복합적으로 사용한 복잡한 프로토콜을 거쳐 제작된 이 작품들은 완성되지 않은 현대성의 흔적들이 겹쳐진 시간적 증거로서 캔버스를 변모시킵니다.
2021-2022년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Who Is Queen?” 전시는 이 연구의 가장 극적인 정점이었습니다[1]. 박물관의 매론 아트륨에서 펜틀턴은 높이 18미터의 검은색 3개의 비계 구조물, 여러 층에 배치한 회화, 비디오 프로젝션, 그리고 아미리 바라카의 목소리, 블랙 라이브즈 매터 시위대의 목소리, 한 로의 음악을 혼합한 사운드 콜라주를 포함한 총체적 설치를 선보였습니다. 21세기를 위한 이 총체적 예술 작품은 박물관 제도에 정면으로 질문을 던지면서 모더니즘 정전의 연대기적 전시에 대한 급진적 대안을 제시했습니다. 뉴욕 타임스의 시다르타 미터가 썼듯이, 펜틀턴은 “모마 내부에 자신의 박물관을 건설했으며, 내부로부터 변화를 경험하는 방법을 제공하는 급진적으로 다른 전시 방식을 제시했다”고 평가받았습니다[2].
이 접근 방식은 1963년 모리스 센닥의 “Where the Wild Things Are”의 문학적 접근과 유사한 비판적 전통에 속합니다. 미국 일러스트레이터처럼 펜틀턴은 자신의 메시지를 더 소화하기 쉽게 만들기 위해 감정적이고 정치적 복잡성을 축소하지 않습니다. 센닥은 젊은 맥스가 분노와 파괴적 충동을 표출할 수 있는 상상의 공간인 맥시몬스터 섬을 창조했고, 그 후 어머니 품의 위안을 되찾았습니다. 이 환상적 지리는 감정의 실험실로서 금지된 정서들이 돌이킬 수 없는 결과 없이 펼쳐질 수 있는 장소 역할을 했습니다. 센닥의 앨범은 유아기의 대안적 지도화를 제안했으며, “야생” 감정의 정당성을 인정하면서도 가정의 질서로 돌아가는 약속을 유지했습니다.
펜들턴은 역사적 확실성과 정체성이 일시 중단될 수 있는 불확정적 공간을 창조함으로써 유사한 방식을 운영한다. 그의 설치 작품은 방문객들이 이념적 GPS 없이 탐험하도록 초대하는 개념적 ‘야생지’로 기능한다. 그가 2008년부터 발전시킨 ‘블랙 다다(Black Dada)’ 개념은 친숙함과 낯섦, 알려짐과 미지 사이의 중간 공간으로 작동한다. 20세기 초 유럽의 다다 운동은 제1차 세계대전 파괴에 대한 충격에서 탄생했으며, 1960년대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해방투쟁과 결합하여 펜들턴은 다양한 저항 형태 간의 심층 연대를 드러내는 시간적 단락을 만든다. 이 예상치 못한 병치는 세르닥이 폴란드계 삼촌과 이모를 친절한 괴물로 변모시켜 어른 세계의 불안을 길들인 방식을 연상시킨다.
2017년에 출판된 ‘블랙 다다 리더(Black Dada Reader)’는 이 접근법의 이론적 실험실 역할을 한다 [3]. 이 선언서 형식의 책은 휴고 발, W.E.B. 듀 보이스, 스토클리 카마이클, 선 라, 애드리언 파이퍼 등 다수의 글을 시간적·학문적 논리를 무시한 배열로 수집했다. 이 실험적 아카이브는 서로 다르게 보였던 역사적 인물들 간의 예상치 못한 연결을 생성하는 기계처럼 작동한다. 자료들을 복사하고 재조합함으로써 펜들턴은 텍스트를 비평적 공연으로 승화시키는 차용 미학을 실현한다. 이 리더는 ‘블랙 다다’ 개념을 단순히 문서화하는 것을 넘어, 활성화하고 확산하며 전염시키는 역할을 한다.
언어의 이러한 공연적 차원은 2018년에 시작된 ‘Untitled (WE ARE NOT)’ 시리즈의 회화에서 그 정점에 달한다. 이 거대한 캔버스들은 ‘we are not’이라는 구절을 끝없이 반복해 단어가 본래 의미를 잃고 순수한 형상적 물질로 변한다. 이러한 의미 소진 전략은 펜들턴이 연구한 미국 작가 거트루드 스타인의 ‘텍스트 초상’ 실험과 유사하다. 스타인과 펜들턴 모두 반복은 단순한 중복이 아니라 내재된 잠재력과 은밀한 조화음을 드러내는 행위이다.
펜들턴의 작품은 스타인에서 존 애셔비, 아미리 바라카에 이르기까지 미국 문학의 실험 전통과 대화한다. 이 계보는 우연이 아니며, 정체성 단순화 논리에 저항하는 예술 공간에 대한 관념을 드러낸다. 펜들턴이 ‘we are not’을 그릴 때 그것은 부정적 선언이 아니라 무한한 가능성의 공간을 연다. ‘We are not’은 결코 끝나지 않는 문장의 시작이자 끊임없이 변화하는 정체성 약속이 된다.
미완성의 시학은 펜들턴의 설치물에서 공간적 번역을 찾는다. 그의 비계 구조는 전시 공간을 영속적 공사 현장으로 변모시켜 고정된 기념비성을 거부하는 불안정한 건축이다. 이 장치는 도널드 저드의 구조물과 사회 운동의 바리케이드를 동시에 떠올리게 하며, 질서와 무질서, 영속성과 시간성 사이에 생산적 애매성을 만든다. 비계는 항상 무너지거나 변모하기 직전인 끊임없이 건설 중인 사회의 은유가 된다.
이러한 자발적인 불안정성은 펜들턴 프로젝트의 가장 급진적인 측면일지도 모릅니다. 현대 미술이 종종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명확히 하는 데 집착하는 시대에, 그는 의도적으로 불투명함, 더듬거림, 불확정성을 선택합니다. 그의 작품들은 지적 허세가 아니라 정치적 신념에 따라 단일 해석에 저항합니다. 핵심 메시지를 손쉽게 제공하지 않음으로써, 관람객이 해독 과정에 참여하게 하여 수용을 창조적 행위로 변화시킵니다.
이러한 해석 저항의 미학은 아프리카 디아스포라의 역사적 경험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에두아르 글리상(Édouard Glissant)이 보여주었듯, 불투명함은 식민 지배권력의 완전한 투명성 강요에 맞서는 종속 문화의 기본 권리입니다. 불확정성을 키우면서 펜들턴은 이러한 저항 전통을 재활성화하며 동시에 그것을 현대 미술의 영역으로 옮깁니다. 그의 작품들은 의미를 생산하지만 결코 고갈시키지 않는 ‘독신 기계’로서, 의미의 문제를 열어두는 해석 생성기입니다.
현재 허쉬혼 미술관에서 2027년 1월까지 전시 중인 “Love, Queen” 전시는 이러한 의미 확산 논리를 한층 더 발전시킵니다. 미술관의 원형 전시장들에서 펜들턴의 작품들은 미궁 같은 여정을 만들어내며, 각 회화는 최종적인 체계화가 불가능한 방식으로 다른 작품들과 공명합니다. 작품 간 의미의 흐름은 펜들턴의 또 다른 주요 참고 문헌인 질 들뢰즈(Gilles Deleuze)와 펠릭스 가타리(Félix Guattari)가 중요시한 리좀 구조를 연상시킵니다. 2016년 전시 “Becoming Imperceptible”은 “천 개의 고원”에서 제목을 차용하며 두 프랑스 철학자들에게 명백한 경의를 표했습니다.
이론적 계보는 펜들턴 작업의 본질적으로 철학적인 차원을 비춥니다. 들뢰즈와 가타리처럼 그는 예술을 동일성 포획 장치에 맞선 전쟁 기계로 구상합니다. 그의 작품은 탈영토화를 통해 작동하며, 기호들을 원래 맥락에서 떼어내 새로운 배열로 끌어들입니다. “Black Dada”는 이러한 유목 개념 중 하나로 기능하여 분류 시도의 고정화를 회피합니다.
이러한 개념적 유동성은 펜들턴 작업의 국제적 차원을 설명합니다. 2015년 도쿄 궁전, 비엔나 무목(Mumok), 베니스 비엔날레 벨기에관에서의 전시들은 그의 예술 어휘가 서로 다른 지정학적 맥락에 적응하면서도 비판적 힘을 잃지 않는 능력을 보여주었습니다. 벨기에의 콩고 식민 유산을 질문함으로써 펜들턴은 유럽 역사와 아프리카 해방 투쟁 간의 지하 연결 고리를 드러내어 그의 미학적 프로젝트의 정치적 범위를 현실화했습니다.
작업의 지정학적 차원은 펜들턴의 영상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납니다. “Resurrection City Revisited”(2023)는 1968년 “가난한 사람들 캠페인”의 기록 영상을 기하학적 형태들과 결합시키는데, 이 형태들은 때로 시위자의 얼굴을 가리거나 때로 둘러싸기도 합니다. 이 그래픽 개입은 역사 기록을 과거와 현재가 공명하는 현대적 증언으로 변모시킵니다. 이미지 곳곳에 등장하는 삼각형과 원은 개념 미술과 디지털 인터페이스를 동시에 암시하여 과거의 투쟁과 현대적 저항 형태 간의 연속성을 시사합니다.
이 겹겹이 쌓인 시간성은 펜들턴 프로젝트 전체를 특징짓습니다. 그의 작품들은 과거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시각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고고학으로서 그것을 구성하는 시간층을 드러냅니다. 미완성 큐브들이 ‘Black Dada’ 시리즈에 출몰하는 솔 르윗의 유산을 재활성화하거나, 급진성이 여러 최근 작품에 영감을 준 게이 아프리카계 미국인 작곡가 줄리어스 이스트먼의 자유정신과 대화함으로써, 펜들턴은 역사적 시간의 선형성을 폭발시키는 창조적 아나크로니즘 형태를 실천합니다.
이와 같이 비연대기적인 역사 인식은 펜들턴이 거트루드 스타인이나 글렌 리곤 같은 문화 전달자의 인물들에 매료되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이 예술가들은 공통으로 미학적 유목을 실천했으며, 전위 예술과 공동체 사이, 유럽과 미국 사이, 지배적인 규범과 소수 문화 사이를 넘나들었습니다. 펜들턴은 경계를 창조적 접촉 지역으로 변환하는 이러한 문화 번역자 계보에 속합니다.
펜들턴 작품의 협력적 측면도 창작에 대한 관계적 접근법을 반영합니다. 디어후프 같은 뮤지션, 이스마엘 휴스턴-존스 같은 안무가, 잭 할버스탐 같은 이론가와의 협력은 예술을 의미 생산의 집단적 행위로 인식하는 개념을 드러냅니다. 이러한 학제적 만남은 전통적 분류를 벗어난 혼합 작품을 생성하며, 매체가 만나는 교차점에 새로운 미학적 영역을 창출합니다.
‘Who Is Queen?’를 동반하는 음향 설치물은 이러한 창조적 오염 논리를 완벽히 보여줍니다. 바라카의 시 낭독 음성, 한 로우의 음악, 퍼거슨 시위대의 외침을 겹쳐 쌓으며, 펜들턴은 서로 다른 저항 세대들이 함께 울려 퍼지는 시간적 중창을 만듭니다. 글렌 굴드에서 영감을 받은 이 ‘대위법’ 오디오 기법은 전시 공간을 과거와 현재의 목소리가 뒤섞이는 역사적 공명의 방으로 탈바꿈시킵니다.
이 중첩의 미학은 펜들턴의 최근 회화에서도 시각적 상응체를 찾을 수 있습니다. 2024년 페이스 갤러리에서 열린 ‘An Abstraction’ 전시의 ‘Black Dada’ 시리즈 작품들은 이전의 단색화보다 유의미한 변화를 나타냅니다. 강렬한 보라색, 금속성 녹색, 선명한 노란색 등의 도입으로 작가의 팔레트가 변모하면서도 층화 논리는 유지됩니다. 이 새로운 캔버스들은 서로 다른 시간성이 충돌하는 화면처럼 작동하며, 고고학과 SF를 동시에 연상시키는 깊이 효과를 만듭니다.
이 복합적 시간성은 펜들턴이 신기술에 점점 더 관심을 갖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가상현실과 인공지능을 활용한 최근 실험은 전통 매체를 포기하지 않으면서 디지털의 미학적 잠재력을 탐구하려는 의지를 드러냅니다. 이러한 테크노 비판적 접근은 현대 이미지 생산과 유통 방식을 탐구하는 히토 스타이어러나 잭 리버만 같은 작가들의 태도를 연상시킵니다.
펜들턴의 상업적 및 제도적 성공, 2012년부터 페이스 갤러리에 입성한 것, MoMA와 구겐하임에 의한 그의 작품 수집, 최근 미국 예술·문학 아카데미의 인정은 그의 작업이 전위와 미술 시장 사이를 오가는 능력을 보여준다. 이러한 양가적 위치는 우연이 아니다. 이는 지배적인 회로를 이용해 잠재적으로 전복적인 제안을 확산시키는 복잡한 전략을 가진 예술가의 면모를 드러낸다. 가장 권위 있는 기관을 점유함으로써 펜들턴은 문화의 성지를 정치적 실험의 실험실로 변모시키는 일종의 전용 행위를 수행한다.
기존 구조의 전술적 도구화는 식민지 이후 작가들이 식민자의 언어를 자기 자신에 대항하여 뒤집는 접근을 연상시킨다. 펜들턴도 비슷한 조작을 하여 서구 개념미술의 코드를 사용해 그 틀을 넘어서는 경험과 이야기를 표현한다. 브라질의 식인 풍습자들이 개발한 은유를 빌리면, 이 “식인” 접근법은 동화를 문화적 혼종 창조 과정으로 전환시킨다.
펜들턴의 작품은 순수 개념성 대신 현실의 복잡성을 포용하는 예술의 비판적 잠재력을 보여준다. 불확정성을 기르며 정체성 논리가 닫아버리는 의미 가능성을 열어둔다. 그의 설치작품과 회화는 상상력이 새로운 주체성 형태, 새로운 공존 양식을 실험할 수 있는 자유 공간이 된다.
펜들턴의 프로젝트의 이 유토피아적 차원은 순진한 이상주의가 아니라 현재의 난국을 인지하여 다른 가능한 구성을 상상하는 예지적 실용주의에서 나온다. 추상과 구상, 예술과 정치, 지역과 세계 사이에서 선택을 거부함으로써 시대를 마비시키는 이분법을 뛰어넘는 대안적 길을 연다. 그의 작업은 현대 미술이 단순히 현실을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고 구체적으로 새로운 세계 존재 방식을 발명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허쉬혼 미술관에서 열린 “Love, Queen” 전시는 이 연구의 일시적 정점을 이룬다. 워싱턴의 원형 갤러리들에서 펜들턴의 작품은 몰입적인 환경을 조성하여 방문을 생산적 방향 감각 상실 경험으로 변모시킨다. 관객은 즉각적인 해독에 저항하는 시각 어휘와 마주하며 반사적 해석 습관을 늦추고 멈추게 된다. 이 연장된 시간성은 아마도 펜들턴 작업의 가장 소중한 측면이다: 가속과 즉시성으로 지배되는 세상에서, 그는 사유가 숨을 고를 수 있는 비판적 명상의 오아시스를 만든다.
이 현대적 속도에 대한 저항은 20세기 미술을 관통하는 비판 전통, 폴 세잔에서 미국 미니멀리스트에 이르기까지의 흐름에 속한다. 이러한 선구자들처럼 펜들턴도 시선의 변화를 위해 시간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한다. 그의 작품들은 저마다의 리듬을 강요하며 관람자로 하여금 진정한 미학적 만남을 가능하게 하는 일종의 느림을 받아들이게 한다.
이 특별한 시간성은 펜들턴 작품들이 만들어내는 매혹의 효과를 설명합니다. 겉보기에는 단순하지만 실행에 있어 무한히 복잡한 구성의 그의 회화들, 전시 공간을 개념적 놀이터로 바꾸는 그의 설치 작품들 앞에서, 관객은 더 이상 압도되는 것이 아니라 무한한 가능성의 개방을 통해 경험하는 현대적 숭고함을 체험합니다. 이 작품들은 최고의 수준의 예술이 세계를 단순히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제까지 보이지 않았던 잠재 가능성을 드러내며 변형시킨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아담 펜들턴의 작품은 21세기의 미적 및 정치적 이슈를 생각할 수 있는 특별한 실험실과 같습니다. 그는 순수한 미학이나 운동적 담론의 간편함을 거부하면서 복잡화에 의해 저항의 형태를 창조합니다. 그의 “Black Dada”는 개념적 바이러스처럼 작용하여 만지는 모든 것을 오염시키고 변화시켜, 확신으로 가득 찬 세상에 새로운 자유 공간을 만듭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불확정성은 이해의 장애물이 아니라 사회 변혁 가능성의 조건이 됩니다. 펜들턴의 예술은 미래가 열려 있음을 상기시키며, 현재의 창조적 불확실함 속을 탐색하는 것을 수용할 때 가능합니다.
- Adam Pendleton: “Who Is Queen?”,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18 septembre 2021 – 30 janvier 2022.
- 시다르타 미터, “Adam Pendleton Is Rethinking the Museum”, 뉴욕 타임스, 2021년 9월 10일.
- 아담 펜들턴, Black Dada Reader, 편집: Stephen Squibb, 런던, Koenig Books, 2017.
- 테런스 트루아요, “Adam Pendleton Celebrates Poetry, Wildness and Black Resistance”, 프리즈, 2021년 9월 22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