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들어봐요, 스놉 여러분 : 에릭 피슐은 아무도 감히 보려 하지 않는 미국을 그림으로 표현합니다. 1948년 뉴욕 출신인 그는 크고 인상적인 회화와 강렬한 색채 팔레트를 통해 미국 교외의 부르주아지를 단순히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해부하고 질문하며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벗겨냅니다. 이는 단순한 관음증을 넘어 집단 무의식의 고고학에 다가가는 것입니다.
1980년대 초 성공 이후, 이 미국 신표현주의의 후예는 아메리칸 드림의 균열을 드러내는 독특한 작품 세계를 발전시켜 왔습니다. 그의 탁월한 내러티브 정확성을 지닌 구성들은 사회적 가면이 흔들리고, 사생활이 스스로 드러나는 순간들을 포착합니다. 롱아일랜드의 햇볕 가득한 수영장, 차분한 거실, 무명의 호텔 방 등에서 피슐은 각 인물이 숨기고 싶은 진실의 무게를 지닌 무의식의 극장을 연출합니다.
피슐의 작품은 에드워드 호퍼와 에드가 드가에 영향을 받은 전통적 회화에 뿌리를 두지만, 인간 관계를 좌우하는 심리적 메커니즘에 대한 깊은 이해에서 힘을 얻습니다. 다른 예술가들이 묘사에 그칠 때 피슐은 질문을 던지고, 감상자가 머무를 때 그는 불편함을 줍니다. 그의 그림은 사회가 마주보길 거부하는 현실을 냉혹하게 비추는 거울처럼 작용합니다.
중간 지대의 영역
피슐의 회화 세계는 미국 현대 문학이 훌륭히 지도화한 모호한 영역을 점령합니다. 존 치버의 교외 단편이나 리처드 포드의 중산층 칼럼처럼, 피슐은 가족 내 숨겨진 말을 숨기고 있는 가정 공간을 탐구합니다[1]. 이 유사성은 우연이 아니라 세 사람 모두가 잔인할 정도로 날카로운 통찰로 부르주아지 삶의 어두운 영역을 들여다보기 때문입니다.
치버의 작품에서는 웨스트체스터 카운티의 수영장이 사회적 존엄성 아래 감추어진 부부 갈등과 개인 실패를 숨깁니다. 특히 “The Swimmer”에서는 주인공이 교외 정원을 지나 수영장에서 수영장으로 이동하는 여정을 통해 점차 몰락을 드러냅니다. 이 수중 은유는 피슐의 회화에서도 시각적으로 반향하며, 물이 가족 갈등과 억압된 욕망을 드러내는 요소가 됩니다.
미국 예술가는 작가와 마찬가지로 미국 부르주아지의 사회적 의례, 즉 상호 작용을 지배하고 진정한 감정을 감추는 암묵적 규범에 매료되어 있습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인 “Bad Boy” (1981)에서는 누드 여성이 침대에 누워 있는 모습을 청소년이 지켜보면서 동시에 남몰래 그녀의 핸드백에 손을 넣는 장면이 그려집니다. 이 모호하고 불편한 장면은 권력, 욕망, 반역의 복잡한 관계를 단일 이미지에 응축하여 인간 관계의 구조를 드러냅니다.
치버의 문학과 피슐의 회화는 이 근본적인 진실을 드러낸다: 잘 다듬어진 교외 주택가의 외관 뒤에는 내면의 악마와 싸우는 개인들이 숨겨져 있다. 알코올 중독, 성적 좌절, 실존적 권태, 부유한 부르주아 계층의 이러한 모든 고통들이 각각의 작품에서 놀라울 정도로 정확한 표현을 찾는다. 이러한 시선의 수렴은 피슐이 E.L. 도크토로우나 자메이카 킨케이드(Jamaica Kincaid)와 같은 작가들과 협업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며, 이들은 모두 미국 영혼의 깊이를 탐구하고자 하는 의지를 공유했다.
이 문학 전통이 피슐의 작품에 미친 영향은 그의 회화적 시간성 개념에서도 드러난다. 전 존재를 드러내는 위기의 순간을 포착하는 치버의 단편 소설들처럼, 피슐의 회화들은 시각적 에피파니를 통해 기능한다. 각 구성은 등장인물들이 무시하고 싶어했던 진실에 직면하는 결정적인 순간을 포착한다.
이러한 내러티브 접근은 줄리언 슈나벨(Julian Schnabel)이나 데이비드 살(David Salle)과 같은 동시대 신표현주의 화가들과 피슐을 구별 짓는다. 이들은 주로 형식적 실험에 집중하는 반면, 피슐은 자신의 화법이 인간 조건에 대한 세계관과 질문에 봉사하도록 한다. 이는 20세기 미국의 위대한 문학 고민과 공명한다.
무의식의 명백한 드러남
피슐이 미국 문학 전통에서 사회적 메커니즘에 대한 이해를 얻었다면, 인간 심리 깊이를 탐구하기 위해서는 정신분석학에 의존한다. 그의 예술 창작 방식은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그의 후계자들이 개발한 무의식 탐구 방법과 놀라운 유사성을 지닌다.
작가 자신은 자신의 창작 과정에서 “서술적 발견”의 중요성을 인정한다. 고정된 아이디어에서 출발하는 대신, 피슐은 여러 이질적인 요소들, 사진, 스케치, 기억 등을 조합하다가 감정적으로 의미를 갖는 구성이 나타나도록 한다. 이 방법은 환자가 뚜렷하지 않은 생각들을 의식에 떠오르게 하여 그 심리 구조를 점차 드러내는 정신분석학의 자유 연상 기법과 직접적으로 상통한다.
피슐 작품의 정신분석적 차원은 특히 청소년기의 성을 묘사한 작품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Sleepwalker”(1979)나 “Birthday Boy”(1983) 같은 그림들은 욕망의 각성과 죄책감, 관음증과 순수함이 뒤섞인 혼란스러운 영역을 탐구한다. 이 작품들은 금욕적인 미국 사회를 구성하는 억압 메커니즘을 밝혀내는 역할을 한다.
프로이트는 그의 “성 이론에 관한 세 편의 논문”[2]에서 성인격 형성에 있어 아동기의 성적 경험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했다. 피슐의 그림들은 이러한 기본적인 통찰을 시각화하며, 청소년기의 경험이 성인이 되어도 계속해서 인간을 괴롭힌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의 등장인물들은 순수함이 인식으로 전환되는 그 결정적 순간들, 즉 기준이 되는 트라우마의 흔적을 지니고 있다.
작가는 또한 라캉의 무의식의 바라봄 구조에 관한 분석과 공명하는 시선과 관음증에 대한 성찰을 전개한다. 자크 라캉은 인간 욕망이 타자의 시선을 중심으로 구성되고, 우리의 정체성이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을 통해 형성된다고 보았다. 피슐의 구성은 이러한 보는 자와 보여지는 자의 변증법을 끊임없이 재현하며, 인물들이 비밀스러운 욕망을 드러내는 서로 교차하는 시선의 네트워크에 갇히는 상황을 창출한다.
이러한 정신분석적 차원은 피슐(Fischl)의 작품들이 관객에게 종종 불안한 이질감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를 이해하게 해준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그의 가정 장면들은 명백한 내용 너머에 감정적 부담을 담고 있다. 프로이트가 분석한 꿈들과 마찬가지로, 이 이미지들의 깊은 의미는 보여주는 것보다 암시하는 것, 즉 그것을 바라보는 이가 떠올리는 연상작용에 있다.
피슐의 작품에서 아이의 모습을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정신분석 이론에 비추어 분석할 가치가 있다. 종종 나체이거나 취약한 상황에 있는 이 아이들은 사회화 과정에서 억압해야만 하는 우리 내면의 일부를 구현한다. 이들은 잃어버린 순수함을 상징할 뿐 아니라 문명에 의해 길들여지기 전의 인간 욕망의 날것의 진실을 나타낸다.
정신분석은 예술이 욕망의 승화, 즉 리비도 에너지를 미적 창조로 전환할 수 있게 한다고 가르친다. 피슐의 작품은 집단 무의식을 가로지르는 환상과 불안을 구체적인 형태로 표현함으로써 이 과정을 완벽히 보여준다. 그의 회화는 각 관객이 자신의 내면 악마를 인식할 수 있는 투사 공간으로 기능한다.
감정을 위한 기술
피슐의 기술적 숙련도는 그의 예술적 비전을 완전히 지원한다. 자유로운 붓놀림과 표현적인 색채 사용으로 특징지어지는 그의 화풍은 그의 최고의 작품들에 나타나는 확산된 불안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그의 기법은 에드워드 호퍼에서 필립 펄스타인에 이르는 미국 회화의 거대한 전통의 영향이 분명하며, 동시에 놀라운 일관성 있는 개인적인 조형 언어를 발전시킨다.
피슐의 빛의 사용은 특별한 주목을 받을 만하다. 호퍼와 마찬가지로, 빛은 단지 장면을 밝히는 것을 넘어 의미의 구성에 참여한다. 종종 인공적인 이 선명한 빛은 숨기는 만큼 드러내며, 말하지 않는 것들이 자리한 그림자 영역을 만든다. “American Hula”(2020)에서, 저무는 황금빛 빛은 체조 연습을 미국 제국의 쇠퇴에 대한 멜랑콜리한 명상으로 변모시킨다.
피슐의 구도는 또한 영화적인 논리에 따라 진행되어 작품의 서사적 임팩트를 강화한다. 그의 인물들은 관객이 상상해야 하는 이전과 이후 사이에 마치 걸려있는 것처럼 보인다. 매체 회화의 특성인 이 탄력적인 시간성은 피슐로 하여금 하나의 이미지에 심리적 상황의 모든 복잡성을 응축할 수 있게 한다.
예술가의 스타일 진화는 새로운 표현 수단을 끊임없이 탐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Hotel Stories”(2024) 같은 최근 작품들은 수단의 절제와 보여주기보다 암시하는 능력을 드러내며 성숙한 예술적 완성도를 보여준다. 이러한 회화들은 내러티브의 모호함을 기꺼이 수용하여 관객을 해석자의 위치에 놓고 제공된 시각적 단서에서 이야기를 직접 구성하도록 만든다.
현대 미국의 거울
피슐의 작품은 단순한 사회학적 관찰의 범주를 넘어 현대 미국의 진정한 엑스레이를 제시한다. 최근 작품들은 새로운 집단적 불안의 출현으로 특징지어지며, 미국 사회의 변화에 그의 시선을 적응시키는 예술가의 능력을 증명한다.
팬데믹과 미국을 흔든 정치적 긴장의 맥락에서 제작된 〈Late America〉(2020) 시리즈는 더 어둡고, 더 불안한 에릭 피슐을 드러낸다. 종말론적 멜랑콜리로 가득한 이 작품들은 의심과 분열에 휩싸인 한 국가의 미래를 묻는다. 이 작가는 초기 회화에서 익숙했던 배경을 버리고 인물들을 불명확한 풍경 속에 내던지는데, 이는 방향을 잃은 나라를 상징하는 은유다.
이 주제적 변화는 현대 사회에서 예술가의 역할에 대한 성찰과 함께한다. 종종 그가 묘사하는 부르주아지에 대한 아첨이라고 비판받는 피슐은 도덕적 판단자가 아니라 비판적인 관찰자의 위치를 주장한다. 이 입장은 모호하게 보일 수 있으나, 실제로 그의 작품의 힘이다. 고발의 쉬운 길을 거부함으로써 관객 스스로가 때로는 비판하는 체제와 타협한 자신의 모습을 질문하게 만든다.
피슐의 예술은 현대의 모순을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이미지와 소통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그의 그림은 회화의 원초적인 힘, 즉 공감과 통념을 넘어선 질문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되찾는다. 회화적 힘의 이 지속성은 아마도 그의 작품이 국제 미술 시장에서 상당한 가치를 인정받는 상업적 성공을 설명해 준다.
그러나 피슐의 작업을 상업적 차원으로만 축소하는 것은 현대 미술에 대한 그의 중요한 기여를 간과하는 것이다. 개념미술이 지배하는 시대에 내러티브적 형상을 재평가하며, 그는 회화 표현에 새로운 길을 열었다. 오늘날 그의 영향은 예술적 참여와 대중 이해도를 조화시키려는 많은 젊은 화가들에게서 느껴진다.
피슐의 작품은 진정한 예술이 자신의 시대를 단순히 반영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형성하는 데 기여한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동시대인들의 불안과 욕망에 플라스틱한 형태를 부여함으로써, 이 미국 작가는 사회적 변화를 가능케 하는 집단적 인식에 참여한다. 그의 그림은 단순한 증언을 넘어서서, 창작 당시의 지리적·시간적 한계를 훨씬 뛰어넘는 현실 이해의 도구다.
피슐의 세계를 관통하는 이 여정을 마치며 분명해지는 점은, 그는 미적 야망을 결코 포기하지 않고 형상 회화의 코드를 새롭게 한 중견 예술가라는 것이다. 문학과 정신분석학에 뿌리를 둔 그의 작업은 극히 예리한 감각으로 현대를 이해하는 데 기여한다. 이미지로 넘쳐나는 세상에서, 에릭 피슐은 회화 예술이 대체할 수 없는 계시의 힘과 사회적 외양 뒤의 인간 본질을 포착하는 독특한 능력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 리차드 포드, “Rock Springs: Stories”, Atlantic Monthly Press, 1987
- 지그문트 프로이트, “성 이론에 관한 세 논문”, 갈리마르, 1987
















